A specialist turning ideas into reality
저는 지방시, 메종 마르지엘라, 알렉산더 맥퀸, 버버리 등 유럽 럭셔리 브랜드의 샘플을 제작하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모델레리아 'kuoyo'에서 프로토티피스타prototipista로 일했습니다. 프로토티피스타는 첫번째 가방을 만드는 사람,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를 실물로 구현하는 사람을 부르는 이탈리아말입니다.
최고 수준 브랜드의 훌륭한 디자이너가 그려온 스케치를 현실화하는 작업은 어렵지만 매우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컬렉션이 다가오면 디자이너와 함께 가방을 고민했습니다. 그렇게 제작된 샘플이 패션쇼에 오르는 것을 본 뒤에는, 제품이 양산되기까지 여러 과정을 함께 하며 문제점을 찾고 더 나은 작법으로 보완했습니다.
럭셔리 브랜드를 위한 가방을 만들던 피렌체의 프로토티피스타는 이제 스스로 제작자가 되어, 첫 레이블을 내놓습니다. 내 가방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오래 전의 일입니다. 그 가방이 어떠해야 할 지 긴 시간 궁리했습니다. 오래 들고 싶은 가방, 오래 들 수 있는 가방이 되었으면 합니다. 마음을 다해 만들겠습니다.
Mano, beyond handcraft
재료 표면의 질감, 접히는 탄성, 쥐었을 때의 무게감 등 손은 여러가지 감각을 총제적이고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알맞은 적당함은 숫자나 그림으로 표현하기 힘든 영역에 있습니다. 첫번째 프로토타입을 두고, 디자이너와 프로토티피스타가 가장 중점적으로 다듬어 나가는 것도 바로 마노mano입니다. 마노는 손을 뜻하는데, 이탈리아 가방 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이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잘 만들어진 좋은 가방은 마노가 좋은 가방입니다. 좋은 디자인은 대체로 가방 제작의 첫 단계에서 결정되지만, 좋은 마노는 가방 제작의 마지막 단계에서야 비로소 완성됩니다.
핸드크래프트, 수제, 수작업이란 단어는 때로 명품이나 럭셔리 브랜드를 수식하는 단어로 쓰입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수작업인지를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손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입니다. 다만 진정한 핸드크래프트의 가치는 손의 노동이 아니라, 손의 감각에서 탄생한다고 믿습니다. 손에서 느껴지는 좋은 감각, 좋은 마노를 가진 가방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마키니스트macchinist에 담았습니다.
In praise of macchinista
이탈리아의 가죽 산업에는 일면 보수적인 분위기가 있습니다. 가방 제작을 총 지휘하는 책임자들은 남성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가방 제작의 전 과정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수많은 여성 마키니스타들의 기량입니다. 세계적인 유명세를 가진 럭셔리 브랜드의 명성은 화려한 무대 위의 모델과 세련된 디자이너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춥니다. 저는 묵묵히 꼼꼼하게 일하는 마키니스타들의 손과, 그 마음도 때로 주목받았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마키니스타macchinista는 재봉사라는 뜻입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재봉틀을 마키나 다 쿠치레macchina da cucire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브랜드 마키니스트는 마키니스타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새로운 디자인을 현실로 구현하는 것은 매번 도전적인 과제였습니다. 어려움에 맞닥뜨리거나, 한계라고 느껴질 때 늘 힘이 되어 준 사람들이 마키니스타들이었습니다. 품 넓고 따듯한 위로도, 오랜 경험에서 나온 기술적 조언도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이탈리아에서 지내면서 가장 따듯한 순간에는 늘 그녀들과 함께였습니다.
이름 ‘마키니스트’는 저와 함께 일했던 재봉사인 산티나, 알렉산드라, 눈치아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수많은 마키니스타를 향한 오마주입니다. 지금도 자신이 있는 곳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모든 여성들을 위한 헌사입니다.